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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유람: 02 고난의 행군 (오사카)
    Jan 19 - JPN 2020. 4. 11. 21:18

    아침 8시에 일어났다. 어제 타코야키를 밤늦게 먹고 잔 것 치고는 굉장히 이른 기상. 이리저리 뒹굴다 보니 몇 시간이 흘러 있었다. 그렇게 아침부터 체력이 떨어지니 생각나는 건 밥. 점심 중에서도 밥이 먹고 싶다는 호랑이 말에 근처 즐겨찾기를 해뒀던 지유켄 (自由軒)으로.


    어제에 이어 오늘도 대기가 없어서 편하게 가게로 들어갔다. 분위기는 그야말로 일본의 노포. 카레라이스와 하야시라이스로 유명한 경양식집, 아니 카레라이스집이다. 다른 걸 시킨 사람도 잘 없어 보였다. 호랑이는 명물이라는 카레라이스를, 나는 다른 것도 같이 먹어보자는 생각에서 하야시라이스를 시켰다.


    호랑이의 엄청난 재료 식별능력을 바탕으로 한 비평에 따르면, 차이는 케첩뿐이었다고 한다. 심히 의심스럽지만 그럴 겨를이 당시엔 없었다. 너무 맛있어서 눈앞에 있는 것을 어서 위로 빠르게 이동시켜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호랑이는 덧붙여 라멘을 먹으러 다니다 여기에 다시 들르면 입맛이 살 것 같은 미친 맛이라고 평했다. 그 말에 갸우뚱하며 무슨 뜻이야 하고 물었더니 강황이 만드는 밸런스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며, 그것도 모르냐 하며 타박했다. 나는 그런 건 모르겠고 맛도 잘 못 느낀 채 말 그대로 뚝딱 헤치웠다. 잘 모르겠다. 금방 사라졌다.



    다 먹고는 드럭스토어 하나에 들렀는데, 여태 본 곳 중엔 제일 가격이 저렴했다. 하지만 이런 정보를 사전에 얻을 수 없으니 여기에서 다 구매하진 못했다. 눈썰미가 좋은 그에게 감탄할 뿐 다른 무언가를 여기서 얻을 순 없었다.



    식후 카페에 들르기 전 중고서점으로 유명한 북오프 (BOOKOFF)에 들렀다. 예전 2015년쯤이었던가, 『일상』이 10권으로 마무리를 지을 무렵 나는 한정판을 구매하기 위해 마침 일본으로 놀러간 호랑이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10권 한정판을 사오거라." 그때는 지금과 같은 관계는 아니었고, 단순하고 일방적인 심부름이었다. 호랑이는 의리가 있는 동물이라서 이런 요청을 듣고 서점을 네 군데나 방문했었다고 한다. 그 결과 나에게 일상 10권이 생겼으면 좋았겠으나 안타깝게도 구할 수가 없었다. 사실은 네 군데나 찾았다고 했을 때 놀라기보다는 일본어를 못해서 못 구한 게 아닌가 의심부터 했었다.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열심히 찾아줘서 고맙다는 글을 여기 남긴다.


    이 날도 일상 10권 한정판은 물론, 일반판도 북오프에서 구하지 못했다. 이젠 일반판이야 아무데서나 파는 흔한 물건이지만 이미 풀린 흔한 걸 제돈 주고 사긴 싫어서 일본에 올 때마다 자주 북오프에 방문한다. 10권은 없었지만 오가와 요우코 (小川洋子)의 문고본 몇 권을 대신 집어들었다. 『펭귄 하이웨이』의 표지 아트워크가 되게 예뻐서 보여주고 싶었는데 중고서점엔 없었다. 내가 이렇게 덕질에 몰두하면서 자연스레 호랑이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아마 알지도 못하는 문자의 바다에서 어푸어푸 헤엄치고 있었을 호랑이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책을 사서 카페로 이동했다. 미리 찾아둔 아라비아 커피 (アラビヤコーヒー)에 갔다. 일본은 2020년이 되어서야 일부 식당 내 금연이 도입된 터라 당시엔 카페 내에서 금연이 일반적이지 않았다. 우리가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아 우리 앞 좌석에 앉아 있던 한국인이 담배를 피워대는 것을 보고 괜히 왔나 생각까지 하게 됐다. 그런데 커피와 같이 시켰던 샌드위치를 마시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커피를 마시는 게 아니라 샌드위치를? 이 아라비아 샌드위치의 위용에 관해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은 정말 대단하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특히 계란이 너무 부드럽고 살살 녹다는 말이 뭔지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호랑이 선생님의 표현에 따르자면 간명하게 요약된다. 미쳤다. 커피 또한 입맛에 딱맞았다고 말씀도 하셨지만 사실 커피는 뒷전이었다. 분명 우리는 밥 먹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샌드위치를 마치 밥을 며칠 굶은 것마냥 흡입했다. 맛있게 먹고 난 호랑이 선생님의 몇 가지 부연설명에 따르면 샌드위치 안에 미량 들어 있던 와사비의 톡 쏘는 맛이 '존맛탱'이라고 격조높은 어휘를 구사하셨다.


    그래도 커피를 좀 이야기해야 하니 적어놓자면, 나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만델링을, 그는 비터한 테이스트를 좋아하니 브라질. 내가 제일 싫어하는 흡연충들을 앞에 두고도 전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이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니. 그렇게 즐기고는 호텔로 돌아와 다시 뒹굴거리다 다시 외출.


    먼저 갈 곳은 호리에 주변 동네였는데, 여기가 망원동 연남동이나 부산식으로 말하면 해리단길이나 전포동 남동쪽 같은 곳이다. 유명하기로는 저런 예시에 비하지 않지만. 일본하면 디저트고 디저트의 최고봉은 빵이 아니겠는가 하는 신념을 가진 두꺼비. 그가 골라 둔 베이커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첫 번째로 들른 곳이 가장 평이 좋은 베이커리형 카페인 웨스트 우드 베이커스 (WEST WOOD BAKERS). 이곳에서는 브런치 메뉴와 함께 빵을 여러 가지 준비해두고 있는데, 하필 우리가 갔을 즈음에는 빵이 동나 있었다. 물어보니 지금은 브런치말고는 되는 게 없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듣고 시무룩해져 가게를 조용히 나갔다.


    괜찮아. 이럴 줄 알고 네 곳이나 후보를 뒀던 것이다. 여기 신사이바시 2쵸메 (2丁目)의 유명한 힙스터 거리 오렌지 스트리트를 여유로이 거닐며 다음 빵집을 찾아나서면 되는 것이다.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가자.


    그렇게 두 번째 빵집에 도착했더니 닫혀 있었다. 문제 없다.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나온다. 거기도 맛있다던데.


    그리고 세 번째 빵집이 닫혀 있단 것을 확인하고 조금 성급해졌다. 말수도 적어지고. 날은 이렇게 추웠던가. 어떻게 이렇게 추운 날 그렇게 우헤헤 하면서 이 먼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던 거지? 그래도 네 번째 빵집 거긴 가봐야 한다. 여기서 좀 먼 거리에 있지만 주식에도 추매가 있듯이 지금와서 접고 라멘 먹으러나 갈 수는 없다. 디저트로 유명한 나라에 왔으면 디저트를 먹어야지. 왜 디저트를 볼 수 없는 거지. 멀지만 가 본다.


    멀리서 보이는 르 피노 (Le Pineau). 바로 네 번째 후보다. 목록에 넣어두면서도 이렇게 멀리까지 갈 일은 없겠지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우리가 와 있다. 그런데 열려 있는지 잘 분간이 안 돼 더 불안해졌다. 다행히 횡단보도 앞에서 영업 중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큰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하고 다시 세상 여유로운 척 웃으며 가게로 들어갔다.


    사진이 보이는가. 이게 바로 내가 기대한 디저트 왕국의 디저트 신민들이다. 모두를 데려갈 순 없어 몽블랑과 딸기 쇼트케이크를 메인으로 구매하고 쿠키도 쟁였다. 쿠키는 두 종류 중 망설였는데 맛을 물어보니 뭐라고 하긴 하는데 그게 뭔지 정확히 몰라서 아는 맛으로 안전하게 선택했다. 자 배도 고프니 이제, 드디어 라멘 먹으러.


    그런데 말입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난관이 있었다. 상점가 고속도로를 통해 걷는 도중 비범한 향이 배가 고프고 날도 추운 거지 행색을 한 우리의 코를 자극했다. 도저히 참지 못했던 것인지 킁킁 거리며 냄새의 연원을 몸소 추적해나간 호랑이는 금방 범인을 잡아냈다. 사전조사할 때에 잠시 봤던 크루아상 가게였다. 르 크루아상샵 (Le Croissant Shop)이라는 체인인데 가격에 비해 너무 맛있었다.



    저녁 먹으러 가는 길에 크루아상을 길에서 우적우적 씹으며 움직였다. 조금만 먹겠다고 했지만 가는 길에 상당히 먹었던 것 같다. 호랑이도 배가 상당히 고팠는지 맛이 경이롭다고 표현했다. 너무 배가 고팠고 그 와중에 너무 맛있었는지 이 힘든 행군에도 '어쩌면 꽤 괜찮은 모험일지도….'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큰 오산이었다.


    호랑이는 우리가 얼마를 걸어야 할지 전혀 알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간단히 호리에를 돌아나가며 라멘을 먹을 예정이었지만, 키타호리에까지 와버렸다. 너무 멀리까지 와버린 것이다. 그럴 일이 전혀 없을 거라 가볍게 여기고 교통카드를 챙겨 오지 않은 우리는 (당시 그에겐 비밀이었지만) 2.5 km 이상을 걸어야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거리는 점차 늘어난다. 가게 문을 연 베이커리를 이리저리 찾아다녔던 우리는 같은 짓을 라멘집 찾으며 반복한다. 우리가 미리 찾아둔 라멘집에 오래 걸려 겨우 찾아갔더니 이런 제기랄 비정기 휴일이라고 적혀 있다. 저녁은 후보지를 안 정해놨는데…. 그래서 그 자리에서 대체지를 찾아나선다. 라멘집도 몇 곳이 닫혀 있어서 점점 우리 마음도 닫혀갔다. 체력이 좋지 않은 호랑이는 분명 엄청 힘들었을 텐데 그는 그래도 전혀 화내지 않았다. 너무 미안했다. 호랑이는 이 고난의 행군을 겪으며 10년은 늙은 것 같다고 평했다.



    마침내 찾아낸, 평은 좋지만 원래 우리가 있던 위치에서 또 상당한 거리에 있는 곳. 르 피노에서 3.5 km 이상은 걸었다. 분명 여긴데 가게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아 근처를 서성거리기만 몇 분. 호랑이가 결심한 채 들어가자 다행스럽게도 그곳이 맞았다. 나는 호랑이가 들어가고도 믿지 않았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아무데나 들어가네, 라고 생각했다. 호랑이는 직감으로 여기다 싶어서 계속 들어가자 했지만 나는 도통 납득되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 앱을 이용해 가게 외관 사진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거기가 맞았다. 간코라멘이라는 곳인데, 정확한 점포명은 宗家一条流 がんこラーメン 十八代目이다. 길다.


    호랑이는 에비유, 나는 네기유로 만든 라멘을 골랐다. 둘 다 시오라멘. 주인장 아저씨도 친절했지만, 호랑이 표현을 빌리면 "파는 만능이다"라고 할 정도로 맛있었다. 에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네기유 시오라멘은 국물이 끝내줬다. 주인장도 예전에 한국에 가서 치느님을 영접하고 온 적이 있다고 했다.


    우리가 먹고 있을 땐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먹고 나오면서 보니 대기석까지 사람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너무 힘든 여정이었던 관계로 나머지 일정은 취소하고 호텔에 틀어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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