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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향의 말러 4번돌아다니며 2020. 1. 22. 05:15
나와 말러
내 2019년의 끝과 2020년의 시작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비롯되었다. 말러. 말러의 교향곡을 듣고, 말러의 또 다른 교향곡을 느끼고, 말러의 새로운 교향곡의 다른 연주와 표현을 감상하며 겨울을 녹였다. 웃긴 일이다. 나처럼 말러를 혐오했던 사람이 또 있을까? 말러의 인간성이 아니라 그의 작품 하나하나를 싫어했다. 팬질과 작품성은 무관하다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더 잘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깨닫고 있지만 어째서 극성인 그들을 말러의 작품 위에 투영하고 편협한 잣대를 두고 그의 음악을 들었을까. 내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틀린 것은 틀린 것이라며 지적해주고 싶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의 음악을 그때에 이해하고 음미하고 싶다는 말은 아니다. 분명히 음악을 이해하고 나와 작곡가 사이의 어떤 관점에서도 음미할 수 있는 그 순간은 제때 왔음을 믿는다.
첫 말러는 2번이었나 5번이었나 그랬다. 어느 쪽이든 이걸 왜 듣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난 말러보다는 바그너가 좋았고, 바그너보다는 브루크너가 백 배 정도는 더 좋았다. 브루크너의 곡은 말러의 것처럼 장대하지만 처음 듣는 사람도 느낄 수 있는 멜로딕한 구석이 있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이지 리스닝에 가깝다는 장점이겠다. 복잡하지 않은 전개, 그저 편한 구성과 아름다운 선율. 무언가 다른 일을 할 때 틀어두면 그만큼 편한 게 없다. 거기서 이상한 점을 느꼈어야 하지 않나 지금은 생각한다. 왜냐하면 브루크너의 음악을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거기에만 집중해서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으니까. 내게 브루크너는 그 정도였던 것이다. 그렇게 하지도 않았는데 어쩜 이렇게 그의 음렬은 하나같이 이렇게 쉽게 귀에 익는지. 그 이유는 몰랐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다. 쉽게 질리면 쉽게 떠난다. 질린 음악을 듣고 있을 겨를은 없다.
그렇게 겉핥기로 브루크너를 핥핥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왜 바그네리안과 말러리안인가. 차라리 브루크너가 낫지 않나. 아니 그런데 브루크너보다는 모차르트랑 베토벤, 그리고 슈베르트가 낫지 않나. 그렇게 후기낭만주의 교향곡이 좋은가? 어디선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들이미는 질문들은 끝없이 나를 맴돌았고 나는 그걸 마주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생각을 그쪽으로 돌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나는 그렇게 다른 레퍼토리를 탐닉하며 살았다.
교향악에서 눈을 떼면 무엇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나. 역시 실내악일 것이다.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는 사중주도 그렇지만 역시 피아노를 앞세운 수많은 독주곡들. 슈만이 일찍이 피아노 솔로로 교향곡을 구현했듯이 이 필드 역시도 다채롭기 그지없다. 독주곡 안에 교향곡이 있는 것이니 새로운 언어적 토대라고 할 수 있다. 언어는 언어마다 대응되는 의미가 있듯이 교향악의 즐거움은 이 집합에서 어떤 즐거움에, 교향곡의 요소 또한 어떤 요소에 대응된다. 그런 식으로 실내악을 충분히 대안으로 여기고 오랫동안 교향곡 대개를 멀리했다.
레스피기의 모음곡으로 시작해 존 필드의 녹턴을 지나 불레즈의 피아노 소나타를 감상한다. 리게티의 에튀드에 깜짝 놀랐다가 륄리와 라모의 피아노 곡도 둘러보면 어느 순간 지루해진다. 그러면 다시 슈만에 빠졌다가 슈베르트로 갈증을 해소한다. 모차르트, 베토벤, 그리고 바흐. 쉴 새가 없다. 교향곡은 그래도 듣고 싶다고? 간간이 들으면 되지만, 피아노로 옮겨온 것도 있다. 리스트가 방대한 베토벤 교향곡을 모조리 피아노 독주곡으로 옮겨놨다. 그걸 듣는다. 그렇게 별 갖가지 잡다한 작품들에 하나하나 매달리다가 문득 생각이 난다. "왜 이다지도 배우는 게 없는 느낌이지?"
언제부턴가 점점 격이 떨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도 그럴 법하다. 아무리 리스트가 피아노의 화신이며 훌륭하게 베토벤의 교향곡을 피아노로 이식해 왔다한들 베토벤의 오케스트레이션 그 정수를 피아노만으로 구현할 수 없다. 그건 연주의 문제이기도 하고 리스트가 만들어낸 악보의 문제이기도 하다. 리스트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였지만 리스트의 오케스트레이션 능력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물론 친구 쇼팽에 비하면 참된 작곡가라 할 수 있지만 그건 쇼팽이 비교 대상이라서 그렇다.
그렇게 이상함을 느끼고는 교향시도 듣고 육중주, 팔중주로 시작해 향수를 찾는다. 교향곡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역시 한편으로는 아쉬웠는지 나는 말러의 교향곡들을 무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굉장히 궁금해 했다. 말러리안들 광기를 만든 그 기저에는 무엇이 있을까. 무엇이든 어떤 사람이든 장점이 있고 배울 점도 있다. 그도 그럴진대 이렇게 개발광을 떠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째서 묻히면 될 것들이 조금씩 머리를 드러내더니 어째서 전 세계 관현악단의 주요 레퍼토리로 자리 잡은 것인가? 이를 해결하려면 그 작품을 내가 몸소 경험해봐야 했다. 그리고 그 경험에는 레퍼런스라고 불릴 만한 훌륭한 연주와 음악을 이해하기 위한 충분한 음악학적 지식이 전제돼 있어야 했다. 후자는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찬찬히 쌓여 온 것이 있다. 복잡한 화성을 듣는 능력이든, 대위법이 마구잡이로 들어간 음악을 즐길 줄 아는 감각이든. 하지만 전자는 어렵다.
아무리 레퍼런스라 한들, 그게 각기 다른 배경과 음악적 요소에 대한 선호도를 가진 사람들에게 모두 레퍼런스라고 여겨질 리가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무한한 감동을 선사했던 누군가의 열정적인 연주는 또 다른 사람에게는 실수 투성이 감정과잉에 지나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그런 편차를 줄이고 평균적으로 상당한 선호도를 보이는 연주 또한 있지만 여전히 확률론적인 이야기이다. 음악이든 무엇이든 첫인상이 좌우하는 정도와 그로 인한 편견을 매번 돌이켜보면 그저 포악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처음 접한 음악이 별로였다면 그건 별로인 것이다. 연주가 별로인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고려가 이성적으로는 될지라도 다시 다른 연주로 시도하기를 뇌가 무던히 거부한다. 그래서 새로운 음악과 온전히 만나는 것은 자의적인 손길을 어느 정도 벗어나 이루어진다. 열심히 "레퍼런스"를 찾아 들어도 알 수 없었던 황홀함은 우연히도 모두를 찾아간다.
내게 그 순간은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깔아뒀던 배경음악에 정신이 팔려 책을 뒷전으로 둔 작년 겨울이었다. 그 순간이 내게 일어나기까지 여러 퍼즐 조각이 모였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여느 겨울처럼 무기력감에 녹초가 되어 있었다. 나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곁눈질로 줄곧 말러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내가 소음이라고 여기며 경원시하던 베토벤의 대푸가에서 나른한 행복감을 느꼈다. 부단히 뛰어다니며 그의 면접 자료를 모았지만 충분히 내가 정리한 걸 볼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의욕을 읽고 심지어는 잠시 방임적인 태도로 굴기도 했다. 너무 권태로워진 나머지 방 안 중앙에서 누워 내 몸이 조심스럽게 떠오르는 상상을 했다. 다 같은 찰나에 벌어진 일은 아니지만 그때의 나는 그랬다. 그 틈에 퍼즐이 턱 하고 맞아들어갔다.
Kultur- und Kongresszentrum Luzern
2007-08-19Lucerne Festival Orchestra
Claudio Abbado
Arnold Schoenberg Chor and Tölzer Knabenchor
Anna Larsson- Mahler - Symphony No.3 in D minor
故 아바도가 2007년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자신의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지휘한 말러 3번이다. 그게 퍼즐이었다. 나는 단지 책에 적절한 배경음악이 필요했을 터인데, 1악장의 5분쯤을 듣고 나니 책 같은 건 필요 없다는 기분에 휩싸였다. 그 뒤로 그 긴 말러의 3번을, 1시간 하고도 30분이나 되는 대장정을 한 순간도 빠지지 않고 함께했다. 뿌연 안갯속에서 따듯한 빛을 들려주는 호른, 마음을 처절하게 짓누르는 무거운 트롬본. 분명 하나의 틀로 묶였을 텐데 수없이 다양한 소리를 들려주는 둔중한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합주. 거기에서는 평붓을 강하게 찍어 누르며 도화지에 그을 때 나타나는 수없이 많은 서로 다른 선들이 느껴졌다. G를 연주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한 G가 아니었다. 화음도 아니고 배음도 아니었다. 서로 다른 음색을 가진 무수히 많은 G들이었다. 모든 G에선 이쪽저쪽으로 뛰어나가려는 활력이 느껴졌고, 그들이 하나하나 모여 만든 흐름에선 강세와 꾸밈이 분명하게 보여서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는 내 머릿속으로 직접 흘러들어왔다.
금관이 활개치고 심벌이 울리며 피날레를 향해가는 중에도 나는 끝나간다는 느낌을 먼저 받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고양감에 몸을 떨고 있었으니깐. 그리고 마침내 팀파니는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확실히 일깨우며 긴 여행이 마무리된다.
그쯤 되니 이건 음악이 아니었다. 지금은 없는 작곡가와 지휘자와, 수많은 오케스트라 단원은 물론 그들이 작품을 만들 때까지 좋고 나쁜 영향을 주고받은 형체가 있는 것들과 없는 것들, 그리고 그들의 과거와 내 과거 모든 것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어떠한 형식으로라도 그들과, 그것들과 통하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말러를 다시 본 것은 이로부터 2년 전이었지만 나는 진정으로 그를 그때 만났다.
3번의 소름 돋도록 아름다운 6악장 "Ruhevoll"과 4번의 3악장 "Ruhevoll"은 둘 다 아다지오인 만큼 아니, 그 이상의 비슷한 감정을 공유한다. 그 지향점은 다르지만 그 분위기에 실려서는 어디론가로 떠나고 떨어지고 이윽고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3번이 좋으면 4번을 싫어할 수가 없다.
부산시향과 말러
이렇게 말러에 정신이 나가 있던 차에 마침 부산시향에서 말러 4번을 연주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갈 수 있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일단 예매를 한다. 부산시향의 정기연주회는 처음이지만 막힘이 없다. 나는 정기연주회가 처음, 그는 부산문화회관에 가는 게 처음이었다. 이런 나름의 유사성을 가지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전부터 상임지휘자가 바뀌면서 평이 상당히 좋아진 건 익히 들어왔는데, 그걸 내 귀로 확인해보진 못했다. 과연 그럴만한 것인가 기대감과 의구심을 몽땅 실어 날라 회관으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1악장은 실망의 연속이었다. 시작은 이 곡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인 오보. 오보가 A음을 삑사리 낸다. 안 돼! 거기서 transition 들어가서 리드미컬해지는데. 부각해야 할 부분을 죽이는 것도 못마땅했다. 왜 선율이 갈 때 제1바이올린의 소리를 들리지도 않게 처리하고, 제1바이올린의 주선율이 커야 할 때 일부러 작게 처리하는가? 전자는 박자감 있게 나아가서 1악장의 틀을 잡아주고, 후자는 아름다운 선율을 자랑하는 1악장의 이해를 쉽게 한다. 지휘자의 결단으로 인해 이 곡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더더욱 난처해지지 않았을까? 설령 그런 효과를 의도했다손 치더라도 그 음악적 효과가 뭔지를 알 수가 없다. 첼로가 선율을 받아 연주를 하면 제1바이올린이 부드럽고 경쾌하게 낮은음에서 첼로의 뒷받침을 해줘야 하지 않는가.
썰매방울이 다시 울린 후 첫 주제가 되풀이될 때 호른 솔로가 연속 몇 음인지를 다 플랫으로 불던 것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이야 이건 지휘자도 어련히 당황하겠다 싶어서 얼굴을 봤더니 초연했다. 익숙한 일이라는 건지 평정심이 대단한 건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나는 당황스러웠다. 나는 돈을 냈잖아. 거기까지 생각했을 즈음 하나가 더 터졌다. 호른인지 뭔가가 고음을 내지 못하고 무슨 "훙냥-"하는 바람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아 정말 웃겼는데.
주제 선율을 비올라나 첼로가 받았을 때 나와야 하는 바이올린의 피치카토는 들리지도 않고, 트라이앵글은 어디 바람 쐬러 나갔는지 잠시 사라져서 곡이 신비로워야 할 부분을 더욱 신비롭게 만든다. 그 와중에 트럼펫 수석은 실수 하나 없이 완벽하게 연주한다. 나는 트럼펫 솔로를 들으면서 왜 이렇게 1악장을 빠르게 연주하는지 알아챘다.
호른이 본래 속도에서 이 곡을 소화해내질 못하기 때문이다. 말러가 1악장 지시어로 딱 두 마디를 적어놨는데, 그중 하나가 뭐냐면 "nicht eilen", 즉 날뛰지 마라…. 제발 서두르지 마라 이거다. 그런데 이렇게 미친 듯이 달리는 이유는 뭘까. 실황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호른이 긴 호흡으로 1악장을 못 해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플루트와 클라리넷은 양호했고, 오보는 첫 실수 빼고는 괜찮았다. 이렇게 관악이 모이면 또 박자가 서로 안 맞아서 이상한 소리가 나긴 하는데 그래도 따로따로 보면 괜찮다는 말이다. 그런데 호른은 실수가 많아도 너무 많다. 예전에 '실내악 공장'에서 봤을 때는 호른이 참 잘해서 풀랑 육중주 예쁘게 잘 연주하는구나 생각했는데 이날은 대체 무엇이었는지 이해가 안 된다.
더 이야기할 것도 없이 1악장은 쉽게 정리된다. 관악끼리 너무 부딪치고 하모니도 안 나오는데, 고집스럽게 현악 파트 사운드를 줄인 지휘자의 의도를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결론.
2악장도 마음에 쏙 들지는 않았지만 워낙 솔로 바이올린이 돋보였고 저릿저릿한 느낌의 비브라토와 스타카토를 잘 살려서 그거랑 혼자 다이내믹 왔다 갔다 하는 기교 듣는 재미로 10분을 금방 보냈다. 호른은 1악장의 그 호른이 아니었다. 심히 정상적인 호른이라 깜짝 놀랐다. 1악장은 어떻게 된 것이었던가.
3악장은 역시나 아름다웠다. 페이스만 계속해서 아다지오로 유지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생각했지만 그건 선호에 관계된 것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었다. 좋은 말러 4번 연주들은 3악장에서 청자들을 바닥 아래의 바닥까지 끌어내려 자신의 과거와 대면시킨다. 혼자 남겨진 그곳에서 모든 청자는 자신이 경험한 우울함과 비극을 목도한다. 듣는 이들은 이를 피할 수 없고 피하려 하지 않는다. 호랑 씨는 항상 피아노 협주곡이나 교향곡의 아다지오에 굉장히 약한데, 너무 약해서 잘 정도로 상극이다. 그런데 이걸 듣고는 자신의 비극적인 서사를 곱씹고 음악에 맞대어 돌이켜봤다. 감정 없는 연주를 한다는 평에 괴로워하며 타개책에 골몰하던 호랑 씨가, 자신의 감정적인 모습을 음악적으로 나타내지 못해 힘들어하던 호랑 씨가 이 3악장을 듣고 자신의 삶과 음악의 구렁텅이를 연관시켰다는 말이다. 나는 공연이 끝난 뒤 호랑 씨에게 이 말을 듣고 오늘 연주에 감탄했다. 1악장 그 막장 때문에 맥락이 분명 끊겼을 테고 이해도 안 됐을 텐데 그럼에도 이런 감정을 선사해줬다는 것은 이날의 3악장은 어지간히 설득력 있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곡이 워낙 아름답고 구조적으로 사람을 정신적으로 몰아넣는 것도 물론 있을 테지만 그것을 해석해내고 음악의 언어로 탈바꿈시켜 관중들에게 들려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4악장도 좋았다.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 모두. 하지만 소프라노는 실력과 별개로 이 곡에 어울리진 않았다고 평하는 게 솔직하겠다. 프레데리카 폰 슈타데 (Frederica von Stade)나 미아 페르손 (Miah Persson) 혹은 마거릿 프라이스 (Margaret Price) 같은 깔끔한 목소리가 이 곡의 4악장에 좀 더 맞지 않나 한다.
다음엔 조금 더 파트별 연습이 된 상태면 좋겠다. 나올 때 단원들이 말하는 거 들어보니 연습을 적게 한 것도 아닌 듯하던데 왜 관악끼리 안 맞는지 모르겠다. 그런 문제는 사실 서울시향이든 부천시향이든 다 해당하지만 오늘 1악장은 그 이상이었다는 것. 생각 이상으로 글이 쓸데없이 길어져 당황스럽다. 아무튼 좋은 경험이었고 즐거웠다.
부산문화회관 대극장
부산 남구 유엔평화로76번길 1
2020-01-16 19:30-21:35부산시립교향악단 제558회 정기연주회:
2020 신년음악회김이정, 양욱진, 이미연
최수열, 서선영Program
- Beethoven - Triple Concerto in C major, Op.56
- Mahler - Symphony N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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